바이낸스 공동창업자 창펑 자오(CZ)가 자신이 공개적으로 사용하던 암호화폐 지갑 주소를 더 이상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해킹으로 자산을 빼앗겼거나 개인키가 유출된 것은 아니다. 누구나 공개 지갑 주소로 토큰을 전송할 수 있는 블록체인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지갑이 밈코인과 스팸 토큰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CZ의 사례는 암호화폐 지갑에서 자산을 직접 보관하는 ‘셀프 커스터디’가 가진 의외의 불편함을 보여준다. 사용자가 자신의 자산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공개 주소로 토큰을 보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공개 지갑은 원치 않는 토큰도 거절할 수 없다
일반적인 은행 계좌는 특정 거래를 차단하거나 의심스러운 입금을 금융기관에 신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더리움이나 BNB 스마트 체인과 같은 공개 블록체인에서는 구조가 다르다.
누군가 특정 주소로 호환되는 토큰을 전송해 블록체인에 기록하면 지갑 소유자가 사전에 이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전송이 완료된 뒤에도 해당 거래를 취소하거나 기록을 삭제할 수 없다.
유명인의 공개 주소는 이러한 특성을 악용하려는 프로젝트의 표적이 되기 쉽다. 토큰 개발자는 자신의 코인을 유명인 지갑으로 보내 놓고 “CZ가 이 토큰을 보유하고 있다”거나 “바이낸스 창업자와 관련된 프로젝트”인 것처럼 홍보할 수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 탐색기에 특정 토큰이 CZ의 지갑에 표시된다는 사실만으로 CZ가 직접 구매했거나 해당 프로젝트를 지지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누구든 토큰을 전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CZ와 연결된 지갑은 2025년 4월에도 약 9,000만개의 가짜 ‘Grok’ 토큰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블록체인 보안업체 펙실드는 해당 토큰이 여러 주소에 대량으로 배포된 정황을 근거로 사기 가능성을 경고했다. X의 인공지능 서비스인 Grok과 공식적으로 관련된 토큰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홍보 목적의 밈코인과 스팸 토큰, 극소량의 ‘더스트’가 계속 쌓이면서 지갑을 정상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CZ는 해당 주소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신 새로운 지갑으로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지갑을 버려도 토큰은 사라지지 않는다
CZ가 공개 지갑을 포기했다는 표현은 지갑이나 온체인 기록을 삭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블록체인에 기록된 거래 내역과 토큰 잔액은 그대로 남아 있다.
기존 주소도 계속 존재하며 누구나 블록체인 탐색기를 통해 과거 거래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앞으로도 해당 주소로 토큰을 보내는 것 역시 막을 수 없다. CZ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주소를 더 이상 주요 지갑으로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주소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이 때문에 이번 문제의 현실적인 해결책은 블록체인에서 토큰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갑 애플리케이션 화면에서 원치 않는 토큰을 숨기는 것이다.
사용자가 요청하지 않은 토큰을 수십 개 받았다면 지갑을 열 때마다 이를 확인해야 한다. 가치가 없거나 사기 가능성이 있는 토큰까지 정상 자산과 함께 표시되면 실제 보유자산을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실수로 악성 토큰과 상호작용할 위험도 커진다.
Trust Wallet의 ‘코인 무시’ 기능, 문제는 접근성
CZ는 처음에는 원치 않는 토큰을 숨기는 기능이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러 사용자의 의견을 확인한 후 자신이 이 기능의 실용성을 잘못 평가했다고 인정했다.
트러스트 월렛에는 이미 ‘Ignore coins’, 즉 특정 코인을 무시하고 숨길 수 있는 기능이 존재한다. 문제는 해당 기능을 사용하려면 메뉴를 여러 단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CZ는 트러스트 월렛 팀으로부터 이 기능이 이미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현재는 기능에 도달하기까지 다섯 번의 조작이 필요하다며 접근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다만 트러스트 월렛은 아직 구체적인 업데이트 일정이나 변경 방식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CZ의 X 게시물, 관련 보도
향후 업데이트가 이뤄진다면 토큰 목록에서 바로 ‘숨기기’ 또는 ‘스팸 신고’를 선택하거나, 의심스러운 자산을 자동으로 별도 폴더에 분류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핵심은 사용자가 정상 자산과 원치 않는 토큰을 빠르게 구분할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를 단순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숨기기 기능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지갑 화면에서 토큰이 보이지 않도록 설정할 수 있을 뿐, 블록체인에서 잔액과 거래 기록을 삭제하거나 다른 사람의 전송을 차단하는 기능은 아니다.
스팸 토큰과 주소 포이즈닝은 무엇이 다를까?

스팸 토큰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공격이 ‘주소 포이즈닝’이다. 두 방식 모두 사용자의 지갑으로 원치 않는 자산이나 거래 기록을 보내지만 목적과 위험은 다르다.
스팸 토큰은 주로 홍보, 사칭 또는 악성사이트 접속 유도를 목적으로 사용된다. 공격자는 유명인의 지갑이나 다수의 일반 사용자에게 토큰을 뿌린 뒤 토큰 이름, 설명 또는 관련 사이트를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한다.
주소 포이즈닝은 사용자가 송금할 주소를 잘못 복사하도록 만드는 공격이다. 공격자는 피해자가 과거에 사용한 주소와 앞뒤 일부 문자가 비슷한 가짜 주소를 만든다. 이후 피해자 지갑에 극소량의 자산을 보내 가짜 주소가 거래 내역에 나타나게 한다.
사용자가 주소 전체를 확인하지 않고 거래 내역에서 비슷한 주소를 복사하면 자산이 공격자에게 전송된다. 따라서 주소 포이즈닝은 보기 불편한 수준을 넘어 직접적인 자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트러스트 월렛은 2026년 3월 주소 포이즈닝 방지 기능을 도입했다. 사용자가 송금 주소를 입력하면 의심스러운 주소와 알려진 사기 주소를 실시간으로 비교하고, 위험도가 높은 경우 거래 전에 경고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출시 당시 이 기능은 이더리움과 BNB 스마트 체인을 포함한 32개 EVM 호환 네트워크를 지원했다. 트러스트 월렛은 지금까지 2억2,500만건 이상의 주소 포이즈닝 공격이 탐지됐고 확인된 피해액이 5억달러를 넘는다고 설명했다. 트러스트 월렛 공식 발표
CZ가 요구한 코인 숨기기 기능은 이보다 단순한 문제를 해결한다. 주소 포이즈닝 보호 기능이 잘못된 송금을 사전에 막는 보안장치라면, ‘코인 무시’는 이미 들어온 스팸 토큰을 화면에서 정리하는 관리 기능이다.
유명인 지갑으로 밈코인을 보내는 이유
밈코인 개발자가 CZ와 같은 업계 유명인의 주소로 토큰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홍보 효과다. 온체인 전송 비용은 비교적 적지만, 유명인의 지갑에 토큰이 표시됐다는 사실은 X와 텔레그램, 거래자 커뮤니티에서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일부 프로젝트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해 유명인이 해당 토큰을 구매하거나 지지한 것처럼 포장한다. CZ가 토큰 이름을 언급하거나 자신의 지갑에 들어온 자산을 설명하는 게시물만 올려도 시장은 이를 호재로 오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격이 단기간 급등하면 초기 보유자가 물량을 매도하고 뒤늦게 들어온 투자자가 손실을 떠안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유명인 지갑에 토큰이 있다는 사실과 해당 유명인이 투자했다는 사실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특히 낯선 토큰이 지갑에 들어왔다고 해서 이를 판매하거나 교환하려고 관련 사이트에 접속해서는 안 된다. 악성 스마트 계약에 지갑 권한을 승인하면 정상적으로 보유한 다른 자산까지 탈취될 수 있다.
CZ의 지갑 포기가 남긴 의미
이번 사건은 단순히 CZ의 지갑이 밈코인으로 지저분해졌다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공개 블록체인에서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주소로 토큰을 전송할 수 있지만, 사용자가 이를 효과적으로 분류하고 숨길 수 있는 도구는 아직 충분히 직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블록체인의 개방성은 거래를 누구나 검증할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인 동시에 스팸 전송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단점이기도 하다. 결국 지갑 서비스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응은 의심스러운 자산을 자동으로 분류하고, 사용자가 한두 번의 조작만으로 숨기거나 신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CZ는 기존 공개 주소를 정리하는 대신 새로운 지갑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명인의 새로운 주소가 다시 공개된다면 밈코인과 스팸 토큰은 또다시 유입될 수 있다.
지갑을 바꾸는 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지갑 애플리케이션이 스팸 토큰을 자동 감지하고, 원치 않는 자산을 손쉽게 숨기며, 사용자가 악성 계약과 상호작용하지 않도록 명확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트러스트 월렛의 ‘코인 무시’ 기능이 얼마나 간단해질지, 다른 암호화폐 지갑들도 비슷한 관리 기능을 강화할지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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